옛날에만 해도 초등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보면 흔히들 하는 대답이 있었지만 지금의 장래희망 1순위는 연예인인 시대인데요. 그만큼 딴따라라고 비하받던 연예인의 위상은 많이 올라갔으며 단순 근로소득만 가지고는 희망을 찾기 어려운 세대인 만큼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한 방이 그야말로 절실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조용필은 이렇게 연예인이 딴따라라고 무시받고 심지어 방송국 PD들에게 흔하게 구타를 당했던 시기에도 거의 유일하게 선생님이라고 불리면서 예우를 받던 신화적 존재입니다. 이승철조차 때론 지각을 하면 PD에게 혼나며 손을 들고 벌을 섰지만 조용필 만큼은 국장급이 예우를 하며 조심하는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죠.
이렇게 신화적 입지를 갖춘 자존심 센 조용필마저 스스로 어머니라고 부르며 따르고 어려워했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홍상수의 어머니 전옥숙 여사였습니다. 이미 최정상의 명성과 재력을 갖춘 조용필은 왜 대체 홍상수의 어머니를 어려워하며 따랐던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냈습니다. 조용필이 홍상수에게 크게 분노한 적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궁금증을 증폭시켰습니다. 과연 무슨일일까요?
음악 평론가 임진모는 조용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미권 음악을 비틀즈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누듯이 한국의 대중음악은 조용필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눌 수 있다.” 이만큼 조용필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싱어송라이터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는데요.
양희은이 리메이크를 거절했음에도 곡을 무단으로 갖다 쓰며 “미안하지만 저는 원하는건 다 해야 하는 스타일입니다.”라며 뻔번하게 선배 양희은조차 어려워하지 않던 이은미마저 조용필 앞에서는 고개를 감히 함부로 들지 못할 정도라고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지금이야 한국 가요계의 산 역사로 평가받는 조용필이지만, 젊은 시절에는 숱하게 딴따라 취급을 받았고 오죽했으면 서울의 한 술집에서 지인들과 술을 먹던 도중 술집의 한 일행으로부터 술을 함께 마시자는 권유를 거부하자 갑작스러운 ㅍ행을 당하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참사를 겪은 적도 있습니다.
이런 설움 끝에 국내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조영필은 1990년대 초 아직 ‘한류’라는 단어조차 형성이 안 되었을 시기에 옆나라 일본에서도 엄청나게 알려졌던 인물입니다. 이 과정에서 홍상수의 어머니와 깊은 인연이 시작되었는데요.
조용필이 일본에서 발매한 ‘오모이데 마이꼬’ 한국말로는 ‘추억의 미아’라고 불리는 이 곡은 일본 내에서 1986년에 발표됐고 무려 1988년도까지 대략 2년 동안 100만장 이상을 히트친 엄청난 곡이었습니다. 여기에 ‘돌라와요 부산항’ 또한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는데요. 전설적인 원조 한류스타로 특히나 1990년도 조용필의 NHK 홍백가합정 공연은 엔에이 특히 역사상 최초로 자국이 아닌 한국 롯데월드에서 이뤄졌던 만큼 당시 일본 연예인들과 정치인들의 불만이 엄청나게 컸던 공연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사례만 들어봐도 조용필의 일본 내 위상은 대단했는데 그래서인지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일본 대학생들조차 가장 유명한 한국 연예인으로 조용필을 꼽았으며 차인표는 자신의 일본 고모가 조용필 인지도를 설명하기에 산골의 할아버지조차 알 정도로 일본에서 엄청나게 유명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의 일본 성공 신화에 대해 많은 이들이 말하길 ‘오로지 조용필 혼자만의 힘으로 일궈낸 업적’이라고 평가하지만 사실 여기엔 그를 도운 숨은 공신이 한 명 더 존재합니다. 바로 홍상수의 어머니 전옥숙 여사입니다.
그녀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잡혀갔던 시인 김지하의 석방 및 민주화 인사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운동권의 대모로 불렸었고 특유의 여장부다운 성격으로 문화계 전반에 걸친 그야말로 국내 최고 사교계의 여왕봉이라고 불린 인물입니다.
아들 홍상수는 이런 모친의 후광에 많은 도움을 얻었던 인생이었죠. 일례로 홍상수의 첫 작품이었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영화사에서 유례없이 신인 감독에게 시나리오 수정의 재량권을 준 작품이죠. 이는 어머니의 인맥과 영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그녀는 조용필이 일본 진출을 도모했을 당시 흔쾌히 후견인 역할을 맡으며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고마움의 조용필은 어머니라고 그녀를 부르며 많이 의지했다고 하는데요. 때문에 전옥숙 여사가 노년에 치매로 고생 했었을 때 조영필은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워하며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