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원 아나운서가 최근 아침마당을 떠나야 한다고 밝혀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아나운서 중에는 뉴스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사람도 있고 토론을 잘 이끄는 사람이 있으며 예능인보다 더 웃긴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세상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김재원 아나운서는 늘 따뜻한 마음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 주었지만 아침마당을 떠날 예정이라고 밝히며 “아침마당에서 잘리면 뭐 해 먹고 사나”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왜 이런 발언을 했는지 그리고 그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지금부터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김재원을 보고 삼십 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는 곧 환갑을 앞두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는 호텔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다가 화재가 발생해 미용실에서 일하던 몇 명의 누나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지만 그날 이후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뒤늦게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지만, 신앙은 매우 뜨거웠습니다. 훗날 그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 어머니는 아파트 창문을 열고 “예수님 사랑해요”라고 외쳤고 버스를 타고 가면서 옆 사람에게 전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어린 김재원은 그때 무척 창피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뜨겁게 교회를 다닌 지 2년쯤 되었을 때 어느 날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담석증이 진단되었고 수술을 했지만,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알아보니 간암이 있었고, 이후 어머니는 새벽마다 방언으로 기도하며 예수님을 부르기도 하셨지만, 결국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어린 김재원은 어머니 없이 살아가는 삶을 상상조차 못 했고 이후 많이 당황하고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학창 시절 매년 진급할 때마다 반장의 어머니가 학부모 모임을 주최했고 집에 전화가 오면 “엄마 계시니?”라는 질문에 “엄마 안 계세요”라고 대답하며 한부모 가정의 아픔을 절감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둘이 살게 된 그는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아버지는 집안일을 홀로 책임지셨고 특히 아침마다 들리던 아버지의 도마 소리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보통 어머니들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는 경쾌했지만, 아버지의 도마 소리는 서툴고 투박했음에도 어린 김재원에게는 그것이 깊은 사랑의 표현으로 들렸습니다.
아버지는 매일같이 그의 도시락에 계란말이를 싸주셨는데 김재원은 계란말이가 지겨웠어도 아버지의 정성을 알기에 내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재원이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작은 집으로 이사했지만, 아버지의 헌신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후 김재원이 대학을 졸업하자 어머니의 소원이었던 미국 유학까지 보내주셨습니다.
그 무렵 김재원은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짝꿍이었고 교회를 다니며 서로에게 소개팅을 주선해 줄 정도로 친한 친구였습니다. 어느 날 김재원이 “그래도 내가 제일 낫더라”고 고백한 후 2사람은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김재원은 유학 중 아내와 1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웠고 아내가 미국으로 오자마자 결혼해 신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2시 한국에서 전화가 걸려와 시차를 잘못 계산한 줄 알고 화가 난 채로 전화를 받았는데 아버지가 힘없는 목소리로 “재원아, 내가 아프다. 내가 한국에 들어와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치르고 가야겠다.”는 말을 남기며 전화는 끊어졌습니다.
알고 보니 아버지께서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던 것이었고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수화기를 제대로 놓지 않으셨는지 계속 통화 중 신호만 들렸습니다. 급히 사촌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가봐 달라고 부탁한 후 그는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그는 결혼한 지 2달 된 신혼이었고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은 급히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혹시 아버지가 그 사이 돌아가시는 것은 아닌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한국으로 오는 10시간이 10년보다 더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 후 아버지는 병상에서 눈물로 아들을 맞이하며 천만다행으로 의식을 되찾으셨지만 신체의 반쪽이 마비되어 거동이 불편해지셨습니다. 결국 그는 유학 생활을 완전히 접고 그날부터 아버지의 보호자가 되어 밤낮으로 아버지를 간호하는 병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아 드리고 밥을 떠먹여 드리며 또한 걸음마를 가르치며 마치 갓난아이 때 아버지가 해주셨던 일들을 되갚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아버지의 병이 길어질 것 같으니 장인과 장모가 하루는 그에게 “우리가 자네 아버님을 돌볼 테니 미국으로 돌아가서 하던 공부 마저 하고 오게”라며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사실 아버지가 쓰러지던 날 밤새 옆에서 지켜준 분도 장인어른이었습니다. 시집보내고 난 두 달 만에 이렇게 됐으니 어떻게 보면 그분들이 가장 황당했을 텐데도 서운한 말씀 한 번 안 하시고 오히려 사위를 지원하겠다 하니 그때의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음만 받을 뿐 그렇게 할 수는 없었던 김재원은 그렇게 밤낮으로 아버지를 간호하던 중이었습니다.
하루는 병원에서 유일한 낙인 TV를 넋 놓고 보고 있었는데, 그때 손범수 아나운서가 헬리콥터에서 내리더니, 손을 쫙 뻗으며 “KBS 21기 신입사원을 모집합니다”라고 외치자 자신도 모르게 “나도 아나운서나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그가 아나운서의 꿈을 가졌던 건 초등학교 때부터였습니다. 자신의 꿈이 과하다고 판단해 잠시 아나운서라는 꿈을 내려놓았다가 병실에서 우연히 본 모집 공고에 “한번 해볼까”라는 용기가 생겨 이때부터 본격적인 입사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춘천으로 발령받은 후에도 저녁 퇴근 후 두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청량리에 있는 아버지를 보러 갔다가 돌아와 몇 시간 쪽잠을 자고 새벽에 다시 출근하는 생활을 일 년간 반복했습니다. 서울로 재발령을 받고 나서는 5년 동안 아버지를 모셨습니다. 밤늦게 뉴스를 마친 후 아침에는 아버지를 재활병원에 모시고 다녔으며 6년 동안 직장생활과 간호를 병행했습니다. 그러나 ‘긴 병에는 효자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당시 김재원 아나운서는 평일에 ‘아침마당’을 대신 진행하던 중이었는데, 방송이 끝나자마자 아버지의 부고 전화를 받고 사흘간 장례를 치른 후 돌아왔습니다. ‘아침마당’ PD가 그에게 무리한 부탁인 줄 알면서도 토요일 진행을 부탁하자 김재원 아나운서는 ‘나는 방송하는 사람이니까’라고 생각하며 슬픔을 참고 ‘토요 노래자랑’을 진행했습니다.
한때는 간호가 길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긴 병에 효자 없나 보다’라는 생각이 스치곤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죄송스러웠습니다. 6년 동안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어린 시절에 하지 못했던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빨리 떠나실 줄 알았다면 더 일찍 마음을 표현하고 대화를 나눴을 거라는 후회를 지금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버지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KBS 아나운서로 활발히 활동하던 그는 입사 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재충전이 필요하다고 느껴 무급휴가를 내고 퇴직금까지 중간 정산받아 가족들과 함께 갑작스럽게 캐나다로 떠나게 됩니다. 그는 당시 회사나 다른 곳으로부터 공식적인 지원 없이 맡고 있던 3개의 프로그램을 모두 내려놓고 과감히 떠났습니다. 퇴직금을 사용한 이유는 60대에 쓰기보다 40대에 더 효과적으로 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부족한 생활비는 캐나다에서 일식집과 샌드위치 가게에서 설거지와 배달을 하며 충당했습니다. 캐나다에서 공부와 노동을 병행하면서 일상을 벗어나자 매 순간이 행복했고 1달러 팁의 소중함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고마웠던 것은 아들 친구들 집에 배달을 갔을 때 아들이 한 번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점이었습니다. 원래 1년을 계획했지만, 2년이 아쉬워 3년을 채우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는 박사 논문을 쓰면서 ‘아침마당’을 진행하고 또한 대학 강의도 나가면서 캐나다에서의 3년이 충분히 재충전이 되었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던 김재원 아나운서는 2008년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대한민국 주부들에게 재미와 웃음을 선사했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어느덧 환갑을 앞두게 되어 정년퇴직으로 프로그램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아침마당’에서 하차하면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나는 인생을 하나의 나라로 본다. 태어나면 아들이라는 나라에서 살다가 결혼을 하면 남편이라는 나라에 입성하고 아이를 낳으면 아버지의 나라에서 살게 된다. 그런데 이 중에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사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 아이가 사춘기 때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마치 무언수행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시기의 대부분 청소년들은 유전적으로 말을 잘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소통하려는 욕심을 버렸습니다. 대신 아빠는 항상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으로 ‘오늘 별일 없었어?’, ‘밥은 먹었어?’ 같은 몇 가지 질문만 했습니다. 그러다 아이가 유독 말을 많이 하면 대화할 마음이 있다고 생각해 대화를 이어갔고 다시 침묵하면 아이에게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이가 집에서 말을 너무 안 하니까 아내가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이 다행히 친구들과는 잘 어울린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원래 아침마다 휴대폰을 제출해야 하는데 매일 잘 내던 우리 아들이 하루는 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이유를 묻자 아들이 한참 머뭇거리더니, ‘실은 오늘이 우리 아빠가 아침마당에서 마지막 방송하는 날이에요. 제가 그 방송을 꼭 보고 싶어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이 아이의 마음속에 내가 있구나. 아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나를 위로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번은 제가 ‘사랑의 리퀘스트’를 진행하는 기회를 얻었는데 그때 저를 캐스팅하신 디렉터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김재원 씨가 방송국 외부에서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지 잘 모르지만 1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사랑의 리퀘스트’를 진행하는 동안에는 유흥을 자제하시고 문제가 될 만한 행동은 삼가주셨으면 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단순한 방송을 넘어서 일종의 구제활동이며 성직자들이 하는 일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는 ‘아나운서라는 직업은 내 삶이 정돈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나운서라고 하면 흔히 말을 잘하고 상대를 설득하는 능력이 뛰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대화는 마치 유리공을 주고받는 것과 같습니다. 잘 받으려면 조심해야 하고 잘 주기 위해서도 신중해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누가 말을 잘하고 못하는지를 평가하지만 각자 고유의 말하는 방식이 있으며 그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은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서로 다르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소통 강의를 할 때 ‘소’ 그림과 ‘통’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청중들은 일단 웃습니다. 소통이라는 게 이렇게 터무니없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죠. ‘소’와 ‘통’이라는 단어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싶지만 그 통이 소에게 여물통이 될 때 그 둘은 뗄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이처럼 소에게 여물통이 되어야 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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