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임현식의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져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독거 생활을 하던 그는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긴급 이송되었습니다. 특히 시골에서 농약을 뿌리던 중 쓰러졌다고 하는데, 6개의 치아가 갑작스럽게 빠지고 급성 심근경색까지 발생해 신체 상태가 심각하게 나빠졌습니다. 임현식의 이러한 건강 문제는 가족과 관련된 깊은 슬픔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아내가 갑작스럽게 암 진단을 받고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마저 별세하자 그는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임현식의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큰 슬픔을 경험했습니다.
6.25 전쟁 당시 신문 기자였던 남편이 다른 기자 7명과 함께 취재를 위해 북한으로 떠났으나 오랜 시간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그녀는 기다림을 포기하고 광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남편이 33세에 실종되면서 그녀는 26세의 과부가 되어 재혼하지 않고 홀로 자녀들을 키우며 평생을 고생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현식의 어머니는 음악 교사로서 혼자서도 자녀들을 키우며 끊임없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특히 임현식에게는 음악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 어려운 시기에도 바이올린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임현식은 나중에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에서 순돌이 아버지 역을 맡아 자신의 바이올린 실력을 뽐내며 멋진 연주 장면을 연기할 수 있었습니다.
음악가의 꿈을 키우던 임현식은 중학교 시절까지 음악에 전념했으나,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연극에 매료되어 1년간 재수한 끝에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했습니다. 1969년에는 MBC 탤런트 공채에 합격하여 방송계에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당시 5천 명의 지원자 중 여러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36명만이 선발되었으며, 임현식은 MBC 사장으로부터 얼굴이 밋밋하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배우로서 모든 것을 걸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였고 이를 높이 평가받아 마침내 탤런트로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임현식은 탤런트로 발탁된 후 7년 동안 무명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데뷔작인 드라마 ‘수양대군’에서 그는 대사가 한 마디뿐인 포졸 역할을 맡았습니다.
당시 많은 배우들이 신성일처럼 멋진 톤으로 연기하려 했지만, 임현식은 자신만의 독특한 연기 방식을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맛깔나는 조연 역할이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전라도 부안까지 찾아가 판소리 가사를 수집했습니다. ‘춘향전’, ‘별주부전’ 등의 판소리 가사를 직접 모아 2년 동안 연구하고 노력한 끝에 그는 자신만의 해학적인 연기 스타일을 완성했습니다. 임현식은 김수현 작가의 일일 드라마 ‘당신’에서 김수미와 함께 연기했습니다. 그의 새로운 유머 스타일은 연출자에게 과장된 연기로 비춰져 촬영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 연기는 결국 그에게 데뷔 7년 만에 조연상을 안겨주었습니다.
1981년 드라마 ‘암행어사’에서 코믹한 갑봉이 역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1986년에는 일요 아침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에서 순돌이 아빠를 연기하며 평범한 서민 가장의 이미지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생애 첫 CF에도 출연했습니다. 그의 연기는 드라마마다 필수적인 감초 역할의 대명사가 되었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1999년 방영된 사극 ‘허준’에서 이옥 역을 맡아 주인공 허준을 도운 임현식은 특유의 능청스러운 연기로 다시 한번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작은 역할로 시작했으나, 그의 노력과 뛰어난 연기력이 빛을 발하여 결국 출연 분량이 크게 늘어나며 국민 배우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임현식의 연기 경력은 끊임없는 도전과 창의적인 접근 덕분에 더욱 성장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임현식은 사극의 대가인 이병훈 PD와의 인연 덕분에 다양한 사극에서 뛰어난 조연으로 활약하며 배우로서의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연기 생활은 순탄했지만, 드라마 촬영 중 뜻밖에 큰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 서동자 씨가 늑막염과 폐암 진단을 받고 50대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부인의 병원 소식은 임현식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겼지만, 그는 자신의 역할이 시청자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했습니다. 코믹한 배역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시청자가 그의 개인적인 슬픔을 알게 되면 연기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인의 상태를 오랫동안 공개하지 않았고, 병세가 매우 심각해졌을 때 비로소 언론을 통해 상황이 알려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서동자 씨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1974년 임현식은 촬영차 들른 경기도 송추에서 어린 시절 고향과 너무나 닮은 풍경을 보고 그곳에 슬레이트 집을 짓고 정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교사였던 미래의 아내를 만나 결혼해 세 딸을 낳으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받은 건강검진권을 아내에게 선물했을 때, 검진 결과 아내가 결핵과 함께 폐암 4기 진단을 받게 되었고 결국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훗날 그는 이 경험을 이야기하며 건강검진을 통해 아내의 중병을 발견한 것에 대한 복잡한 심정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검진을 받지 않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과 부부로서 충분히 즐기지 못한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송추의 집은 처음엔 간단한 슬레이트 집이었으나, 임현식과 그의 부인은 노후를 대비해 한옥으로 다시 짓기로 결정했습니다. 초반에 부인은 경제적인 이유로 반대했지만, 공사가 시작되자 오히려 열정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부인은 직접 허리띠를 차고 공사 현장에서 인부들과 함께 일했고, 그 결과 지금도 잘 지어진 집으로 남아 있습니다. 임현식은 오랫동안 함께 할 것이라 기대했던 송추의 집에 대해 이야기하며 인생의 불확실성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그는 어머니와 아내의 무덤을 집에서 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나란히 안치했으며, 무덤 근처에는 자신이 직접 쌓은 큰 돌탑을 세웠습니다. 이 행동은 그의 깊은 슬픔과 애정을 상징하며, 두 사람에 대한 그의 사랑과 추모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임현식은 어머니와 아내가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난 것을 인생 최대의 재앙으로 여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암센터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그는 매주 드라마 촬영 현장에 나가 코믹 연기를 지속했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아내가 아파서 암센터에 머리 깎고 누워있는데도 매주 드라마 촬영 현장에 나가서 할 건 해야 할 거 아니냐”며 “연기하는 동안 아내의 병상을 떠올리며 내가 정말 무슨 무당인가 싶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이는 임현식이 겪은 정서적 갈등과 전문성을 유지하려는 그의 노력을 보여주며,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겼습니다. 임현식은 아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드라마 촬영과 아내의 병간호를 병행하며 매우 힘든 시간을 견뎌왔습니다. 그는 촬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모든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습니다. “아내가 틀림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라는 생각에 아내의 의식이 흐릿해지기 시작한 막바지에는 더욱 자주 병원에 머물며 아내를 위로했습니다. “우리 딸들 걱정하지 마. 내가 잘 돌볼 테니까. 시집도 잘 보내줄게”라고 말하며 아내가 이를 듣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어느 날 촬영이 없는 날에 병원에서 밥을 먹으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왔습니다.
병실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무표정한 채로 있었고, 말을 걸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호사의 조언에 따라 “당신이 원하는 거 다 알아. 애들 결혼 잘 시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임현식이 이렇게 말하고 있을 때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고, 그는 아내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내는 그때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의 죽음 후 임현식은 큰 충격을 받아 치아 6개가 빠지는 등 심각한 신체적 증상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 딸이 있었기 때문에 무너질 수 없었습니다. 나라도 열심히, 아내의 몫까지 해야겠다”는 책임감으로 아내가 살아 생전에 했던 약속을 지키며 딸들을 하나씩 결혼시켜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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