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수 배호는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니, 그의 노래와 음악성을 굳이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가슴 아프게 살다 갔으며, 무엇보다 그의 집안이 독립운동 투사의 집안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배호는 키 174센티미터에 체중 65킬로그램으로 늘씬한 몸매에 늘 반듯한 정장을 즐겨 입었던 귀공자 타입의 미남이었지만, 핸섬한 얼굴과 부티 나는 금테 안경에 가려진 그의 삶은 그의 이미지와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살다가 갔는지, 고통과 애통함으로 점철된 그의 삶을 비춰보려고 합니다. 그가 태어난 곳도 일제 치하의 한국이 아니라 중국 산둥성 지난이었습니다. 배호는 부친의 독립운동 때문에 중화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1945년 8월 광복을 맞아 부모님을 따라 환국한 뒤 1948년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배호의 큰아버지 배경진(1910~1948)도 광복군이었던 독립운동가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배호의 형제들은 일찍 죽었고, 나중에 11세 아래의 여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 혼자서 자랐습니다.
남동생 배천금은 유아 때 사망했으며, 1953년에 태어난 여동생 배명신도 2003년 50세로 사망했으니 오래 살지 못한 셈입니다. 장남으로 태어난 배호 역시 그 시절 다른 많은 독립투사의 자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광복 후 중국에서 귀국한 그의 부모는 인천의 한 수용소에서 생활하다가 1946년 4월부터 서울 창신동의 일제 적산가옥에서 살았습니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서 귀국한 어린 배만금(배호의 본명)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부모를 따라 부산으로 가서 피난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휴전 후 다시 서울로 올라온 배호는 1955년 서울 창신국민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그해 8월 21일 부친의 사망으로 가족을 따라 또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서 모자원에서 지냈습니다. 배호는 삼성중학교에 입학해 1학년 때 배신웅으로 개명했고 2학년 때인 1956년 중퇴하고 다시 서울로 되돌아왔습니다. 중학교 중퇴 이후에도 계속 가난에 시달리다가 서울로 올라온 배호는 중국 지난대학 음악과 출신으로 작곡가이자 MBC 문화방송 초대 악단장을 지낸 넷째 외숙부 김광빈의 수하에서 드럼을 배워 대중음악을 시작하면서 김광빈 악단의 드럼 주자로 미8군 무대와 방송국 등에서 활동했습니다.
배호는 12인조 ‘배호와 그 악단’ 밴드를 결성해 서울 종로 낙원동의 프린스 카바레 등에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1957년에서 1964년까지 배호는 일본 메이지대학 문예과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서울중앙방송 악단장과 1964년에서 이듬해 1965년까지 TBC 동양방송 악단장을 지낸 셋째 외숙부 김광수, 그리고 넷째 외숙부 김광빈 악단, 동화, 천지, MBC 악단, 김인배 악단 등에서 드럼을 연주하며 음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배호의 외가에는 이들뿐만 아니라 둘째 외숙부 김광옥도 일본에서 음악대학을 졸업한 후 유명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했습니다.
이처럼 네 명의 외숙부들 중 세 분이 음악 전문가였던 사실을 보면 배호의 음악적 재능은 외가 쪽에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음악의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은 학교를 다닌 것이라곤 중학교 중퇴가 고작이어서 음악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악보를 잘 읽지 못했음에도 소리만 듣고도 바로 연주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배호가 가수로 데뷔한 것은 ‘굿바이’를 불러 데뷔한 1963년 21세 때였으며, 이 곡에 이어 바로 ‘사랑의 화살’도 발표됐지만 본격적인 가수 생활로 들어간 것은 그 이듬해 22살 때인 1964년에 ‘두메산골’과 ‘굿바이’로 음반을 내면서부터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하는 독특한 음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쉽게 각인되기 시작했습니다. 데뷔 음반으로 발매된 ‘두메산골’은 ‘도라지’란 말을 외국어처럼 살짝 굴리는 게 정말 독특했습니다. 배호 자신도 “제 창법이 참 건방지게 멋있다는 말을 들었어요”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기성 대중음악계의 텃세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가 데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일보의 정홍택이라는 기자는 배호 노래를 ‘깡패 노래’라고 혹평하기도 했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배호는 한동안 깊은 고민에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넷째 외숙부 김광빈이 지어준 ‘배호’라는 예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고, 그가 안경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드럼을 배워서 드러머 생활을 시작한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66년 배호에게 시련이 닥쳤습니다. 생각지도 않게 신장염이 발병한 것입니다. 치료 여건이 요즘 같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는 의료기술이나 약이 요즘처럼 발달한 시절이 아니었으니 쉽게 낫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배호는 쉬지 않고 신곡을 냈습니다. 그에게 노래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고 삶의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지병은 더 깊어만 갔고 몸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신장염이 발병했음에도 그해 그는 ‘황금의 눈'(지구 레코드), ‘홍콩 66번지'(신세계 레코드) 두 곡을 더 취입했습니다. 이듬해 1967년 3월 장충동 녹음실에서 취입했을 때는 한 소절 부르고 나서 펄썩 주저앉았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해 25세의 나이로 그가 병상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불러 취입한 신곡이 바로 배상태가 작곡한 불후의 명곡 ‘돌아가는 삼각지'(아세아 레코드)였습니다.
이 곡을 작곡한 배상태가 이 노래를 부를 적당한 가수를 몇 년간이나 찾아도 찾지 못하다가 병상에 누워 있던 배호를 찾아가 사양하던 그를 설득해 병석에서 부르게 됐다는 가슴 아픈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 만큼 이 노래는 앨범이 무려 20만 장이나 팔려 크게 히트함으로써 배호를 톱 가수 반열에 올려놨을 뿐만 아니라 음악 차트 사상 드물게 20여 주 연속 1위를 기록한 그의 대표곡입니다. 나도 이 노래를 즐겨 부르곤 하지만 그 애절함과 허무감은 절절히 가슴에 맺히게 하는 곡입니다. 배호는 가수 사상 드물게 첫 히트곡 1위에 오른 뒤 4개월 만에 MBC 방송 10대 가수로 선정됐습니다.
‘돌아가는 삼각지’ 외에도 ‘누가 울어’, ‘안갯속으로 가 버린 사람’, ‘안개 낀 장충단공원’ 등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배호는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1967년 방송사들이 수여하는 가수상을 휩쓸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1967~1968년, 즉 25~26세의 2년간이 가수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시절을 보낸 셈입니다.
여러 언론사들이 주최한 가요 행사에서 가수상도 수상했거니와 MBC 방송 10대 가수 외에도 TBC 방송 가요대상도 받았으며 치솟는 인기 덕분에 각종 영화에도 출연했으니까요. 1971년 10월 배호는 라디오 ‘이종환의 별이 빛나는 밤에’ 출연을 마치고 귀갓길에 비를 맞고 갔다가 감기에 걸려 그만 신장염이 재발돼 병원에 재입원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최후 단계에서 배호에게 오 헨리의 소설처럼 가슴이 먹먹하게 슬픈 일이 벌어집니다. 그가 입원해 있던 병상 곁에는 1년 동안 떠나지 않고 간호해주던 7세 연하의, 가슴 아픈 사연의 주인공이 되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배호보다 7세 연하였으니 1949년생으로 당시 나이는 22세였습니다. 그녀는 배호 공연 때 배호의 팬으로 만나 배호와 장래까지 약속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숨을 거두기 하루 전 배호는 그날도 병상 곁을 지켜주던 그녀에게 자신의 손목시계와 반지를 건네주면서 자기를 떠나라고 했습니다. 배호는 한사코 안 가겠다고 울부짖던 그녀를 폐가 끊어질 듯한 고통을 참으면서 설득해 눈물로 고향에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당시 두 사람의 심정은 말로 표현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취약한 나로서는 그 외에 달리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녀가 살아있다면 지금 대략 70대 초반의 나이일 것입니다. 어느 곳에선가 지금도 배호 노래를 들으며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눈을 감기 전까지는 어떻게 그의 가슴 시린 연인 배호를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늘이 낳은 불세출의 가수 배호는 그 해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1971년 11월 7일 배호는 결국 운명했습니다. 그의 나이 만 29세로 미혼이었습니다. 그가 가수로 활동한 기간은 15세이던 1957년부터 29살이 된 1971년까지 14년이었지만, 14년 중 그가 본격적인 가수 생활을 한 것은 9년뿐이었습니다.나머지 5년은 드럼을 치는 캄보 밴드 ‘배호와 그 악단’ 생활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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