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아가면서 인생의 굴곡은 누구나 있기 마련이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으며, 어릴 때부터 오르막과 내리막을 모두 경험해야 어른이 되어서도 작은 시련에 무너지지 않고 그때 이겨냈던 경험을 바탕으로도 더 큰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박군 역시 어릴 때부터 남들이 겪지 못한 엄청난 시련들을 겪었으나 꿋꿋하게 이겨내고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온 인물인데요.
그는 한때 어머니와 함께 다리 밑에서 박스를 깔고 잠을 자고 방송에서 돌아가셨다고 고백한 아버지가 사실은 살아계셨다가 진짜로 돌아가시자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8살 연상의 누나와 결혼을 해야 했던 바꾼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박군’ 박준우의 어린시절
1986년 외동아들로 태어난 박군은 부모님이 6살 때 성격 차이로 이혼을 하면서 이후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고, 어릴 때부터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갖은 고생들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당시 생계를 위해서 어머니가 식당 일을 나가면 어린 박군이 홀로 집에 남아 시간을 보내며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스스로 밥을 만들어 먹곤 했는데 그래서 어릴 때 꿈이 엄마가 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어주는 게 가장 큰 꿈이었다고 합니다. 형편이 어렵다 보니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는 새벽 신문 배달을 하며 돈을 벌었다고 하죠.
이후에도 셋방 살이를 전전하며 어렵게 살다 보니 하루는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외삼촌이 같이 살자고 해서 같이 살게 되었는데 당시 외할아버지가 약주를 좋아하셔서 허구한 날 술을 먹고 두 모자를 밖으로 쫓아내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랬던 할아버지가 어느 날 병이 와서 병원에 입원하자 초등학교 3학년인 바꾼이 3개월간 할아버지의 병간호를 해야 했고 심지어 2년 뒤에는 삼촌마저 교통사고가 크게 나 삼촌의 병간호도 책임지게 됩니다.
당시 삼촌이 보험이 없다 보니 밥값이 비싸서 하루 세 끼를 어머니가 도시락을 싸서 주면 병원 버스를 타고 가서 배달해야 했고 또 삼촌의 대소변도 갈아드리고 씻겨드리기도 했는데 이때가 그의 나이 12살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박군의 시련과 고비
어린 박군에게 가장 큰 시련과 고비는 따로 있었으니 그건 바로 어머니의 말기 암 판정이었습니다. 박군의 어머니는 11시간 반 정도의 대수술을 받고 이후 노동력을 잃어 일을 할 수가 없으니 이때부터 박군이 진짜 가장이 되게 되는데 당시 그는 학생이긴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마치면 병원에 가서 보호자 침대에서 자고 아침에는 학교에 가기를 반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할 수 있는 알바라는 알바는 다 했었는데 그중에서도 배달 알바가 시급이 세다 보니 중국집 치킨집 피자집 등 배달이 가능한 알바는 모조리 다 하며 어머니의 병원비를 보태고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습니다.
이 무렵 학교를 다닐 때가 아니라고 판단해서 학교를 그만두고 아픈 어머니를 대신해서 일만 하려고 했으나 하지만 어머니가 무슨 일이 있어도 졸업은 꼭 하라는 당부에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게 됩니다. 이처럼 아들의 지극 정성 덕분인지 1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 선고에도 불구하고 이후 어머니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박군이 고등학교 2학년 때는 학교에서 차원이 다른 장학금을 준다는 소식에 전교 1등까지 차지하며 당시 장학금 75만 원을 받기도 했다고 하죠.
그리고 박군을 기특하게 여긴 생님이 전교 회장에도 출마 권유를 했는데, 처음에는 중국집 알바에 어머니 간호해 학교에는 신경 못 쓸 것 같아서 거절했지만 그럼에도 선생님이 끝까지 하라고 해서결국 전교 회장도 당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특전사가 된 박군
이후 그는 대학교는 생각지도 않았다가 당시 교장 선생님의 추천으로 학비를 지원받아 대학교까지 진학할 수 있었지만, 알고 보니 1 학기만 지원해 주는 걸로 2학기부터는 돈을 내라고 하자 이건 아니다 싶어 대학교는 맛만 보고 그만두게 됩니다.
이후 일을 하다가 하루는 특전사 모집 포스터를 보게 되었고 오로지 월급을 준다는 내용만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을 해보니 어차피 군대는 가야 하고 만약 여기서 4년 3개월을 근무할 경우 나갈 때 목돈을 들고 나갈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하면 이게 특전사인지 특수부대인지도 모르고 지원을 하게 되죠.
그렇게 20살의 나이로 특전사에 입대한 그는 군에서도 특유의 끈기와 성실함을 보여주며 후배들의 존경심과 선배들의 존중을 받는 훌륭한 직업군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무렵 1년의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어머니가 7년을 버텼으나 서서히 기력을 잃으시고 그가 직업 군인이 된 지 3년쯤 됐을 때 결국 아들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온 박군
그는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살아갈 이유 마저 잃어 부대도 전역을 하려 했으나 그런데 당시 부대에서 가족같이 그를 위로하고 배려하자 큰 감동을 받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 생각하다가 15년간 특전사에서 장기 복무를 하며 의리를 지키게 되었다고 합니다.
15년간 군 생활을 하면서 노래를 좋아했던 그는 부대에서 행사가 있으면 늘 무대 위로 올라가 노래를 불렀고 또 주말에는 따로 짬을 낼 양로원을 찾아 다니면서 노래를 불러들이는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고 하죠. 그러면서 서서히 내가 만약 가수를 하면 어떨까 하는 막연한 꿈도 꾸기 시작했고 인터넷에서 우연히 트로트곡 ‘한잔해’를 부를 가수를 뽑는 오디션 공고를 보고 주말이나 개인 시간을 활용해 연습을 한 뒤 영상을 보냈는데 기적처럼 바로 합격 통보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그는 군 생활 15년 차라 4년만 더 군 생활을 하면 전역 후 평생 동안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보니 합격 통보를 받고도 선뜻 가수의 길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일단 주변에서는’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는데 사회에서도 더 힘들다는 연예계를 왜 굳이 발을 들이려 하느냐’며 대부분 반대를 했고 그러면서 선배들은 쓴소리를 후배들은 아쉬움에 하소연을 하며 그의 가수 데뷔를 반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번 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이자 만일 이번에 포기하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15년간 쌓아온 군인 경력과 평생 동안 나올 연금까지 포기를 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마침내 가수로 데뷔하게 됩니다.
그렇게 ‘한잔 해’라는 노래로 가요계에 데뷔한 그는 이후 나름 좋은 반응을 얻긴 했으나 직장인들의 애창곡 정도였지 박군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그러다가 2020년 sbs <트롯신이 떴다>에 출연 하면서부터 드디어 자신의 얼굴도 알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때 박 군의 노래도 노래지만 앞서 얘기한 그의 가슴 아픈 사연이 덩달아 화제가 되어 이를 지켜본 시청자들도 함께 눈물을 흘리고 그의 살아온 인생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자 마침내 가수 박군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전성기에 갑자기 찾아온 푸대접 그리고 아버지
이후 그는 괴물 신인이라 불리며 수많은 광고와 수많은 방송사의 섭외가 되어 트롯맨에 이어 가장 잘 나가는 남자 트로트 가수가 되었는데요.
더욱 놀라운 것은 평생에 한 번 올까 하는 전성기 때 소속사도 팬들도 누구도 예상 못한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를 하게 됩니다. 상대는 바로 8살 연상의 동료 가수 한영으로 두 사람은 한 예능 프로를 통해 인연을 맺은 뒤 선후배 관계로 조언을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호감을 키우다가 연인 관계로 발전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전성기를 누리게 된 그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결혼을 하겠다고 하자 당시 주위에서는 “연애도 좋고 결혼도 좋다. 다만 어떻게 얻은 전성기인데 조금만 더 시간을 가진 후에 그때 결혼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조언을 했음에도 그의 선택은 바뀌지 않고 본인의 결혼 소식을 발표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려했던 대로 갑작스러워도 너무 갑작스럽다 보니 이러한 과정에서 팬들을 위한 배려가 없다며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며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심지어 박군의 온라인 커뮤니티인 박군 갤러리 측도 그의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로 실망을 했다며 갤러리 폐쇄 시점과 더불어 그간 갤러리를 관리해 온 매니저가 작성했던 게시물을 모두 삭제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때 박군은 축하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자신의 sns를 통해 사과문을 게재하기도 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팬분들께 제일 먼저 좋은 소식 전해드리려고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열애설 기사가 먼저 났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어서 팬 카페에 글을 바로 올리지 못한 것에 대해 서운함을 느끼셨을 팬분들께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전하며, “이처럼 기쁜 일도 있으면 슬픈 일도 있는 법인지 이번에는 결혼식을 올리기 3주 전에 오랜 시간 연락이 닿지 않았던 아버지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많이 아프다는 전화로 이와 관련해 그가 고백하기 우선 사실 그동안은 여러 방송을 통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이야기를 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결혼 3주 전쯤 관공서에서 연락이 왔는데 아버지가 몸이 많이 안 좋으시니 빨리 오셔야 한다는 전화였다. 사실 오랜 기간 연락이 되지 않아 너무 놀라고 어쩔 줄 몰라서 경황이 없었는데 그때 아내가 딱 중심을 잡고 옆에서 챙겨주더라 그래서 아내와 같이 아버지를 보러 내려갔는데 당시 아버지는 암인데도 불구하고 1년 가까이 수술도 안 하고 버티다가 온몸에 전이가 돼서 원래 연세보다 20년은 더 늙어 보이더라.
그러다 결혼식이 끝나고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동안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아파했을 것을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파서 아내를 붙잡고 많이 울었다. 진작에 연락을 줬으면 내려가서 같이 밥도 먹고 했을 텐데 그저 안타깝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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