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0년대를 휩쓸었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인 여배우 김지미, 그녀는 뛰어난 미모와 연기력으로 당시 여성들에게 ‘김지미를 닮았다’고 하는 말은 최고의 찬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미모면에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평가를 받아왔는데 당대의 다른 여배우들을 압도할 만큼 최고의 원탑 미인이었으며 여기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동양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로 불리면서 한국 영화를 부흥시킨 최고의 주역이었던 그녀는 4번의 결혼과 4번의 이혼으로 세상을 뜨겁게 만들었는데요.
시대가 바뀌어 감에도 불구하고 금지된 사랑을 했던 그녀는 큰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됩니다. 모란이라 불리는 화려하면서도 굴곡진 그녀에 대해 옛 세대들은 화투를 치다가 6이 나오면 ‘김지미가 나왔네’라고 합니다.
화투 6자 모란에 비유될 만큼 미인으로 이름이 높았기 때문인데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은 영화 감독 홍성기로 당시 김지미는 길거리 캐스팅을 당해 18살의 나이로 <황혼 열차>에 출연을 하게 됩니다.
김지미은 “홍감독이 저보다 12살 많은 늙은 총각이긴 했지만 당시 유명한 감독이었어요. 사실 영화를 찍는건지 사실인지도 모를 정도로 어수선하고 정신없이 몰아치는 와중에 결혼식을 치렀죠.”라고 했습니다.
둘은 1959년 결혼해 첫 딸을 낳지만 3년 뒤 이혼하게 됩니다. 당시 어린 김지미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모르고 결혼을 했던 것도 있지만 이혼의 다른 사유는 최무룡과의 연애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결혼 후 국제극장에 속한 당대 최고 영화사에 최무룡씨와 제가 전속 배우가 됐어요. 일주일에 한두번 집에 들어갈까 말까 하는 상황이었던 거죠.”
“그 나이에 가정이나 남편이 중요하게 보였겠어요.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보니 뭐가 문제인지도 모른 채 이혼하게 되더군요.”
남편 홍성기를 볼 시간은 별로 없고 잘생긴 최무룡과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되고 이들을 둘러싼 사건으로 당시 한국 사회는 떠들썩했습니다.
막 떠오르는 신인 여배우가 이혼하자마자 외도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최무룡의 부인인 영화배우 강효실은 이제 막 아들 최민수를 출산한 상황이었습니다.
최민수를 낳은지 열흘만에 최무룡과 김지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었고 둘은 구속되었고 아이를 낳자마자 남편의 외도라는 엄청난 사실을 직면하게 된 강효실에게 세상은 동정적이었고 그만큼 김지미에 대한 비난은 거셌습니다.
당시 최무룡에게는 돈이 없었기에 김지미의 집을 팔아 위자료를 아내에게 주기로 합의하고 석방되었으며 20대 여배우가 이 정도의 사건에 연루되면 한국 연예계에서는 거의 은퇴해야 했지만 김지미는 그 후에도 변함없이 건재를 과시합니다.
당시 그녀를 욕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한편에서는 ‘당당하게 잘했다.’ ‘내가 못한거 실컷해서 통쾌하다.’라는 얘기들을 편지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김지미와 최무룡은 재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었지만 이도 오래 가지 못하고 7년 뒤 이혼하였습니다. 이 당시 최무룡은 “사랑의 파탄이 가서가 아니라 지미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김지미는 최무룡과 헤어지게 되고 이번에는 11살 연하의 나훈아와 만나게 됩니다. 당시에 연상이나 커플이 드물었기 때문에 또 한번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만 김지미는 나훈아와는 결혼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김지미는 “나훈아가 노래를 잘해 우리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와서 노래를 몇 번 해줬죠.”
“남녀 관계니까 육체적 문제가 좀 있긴 있었지. 그러니 아니라고 할 수가 있나요. 그래서 또 공개하게 된 거예요.”
나훈아와의 관계는 ‘연하의 남자와의 긴 연애였습니다’라며 그와의 관계에 선을 그었는데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고 76년부터 82년까지 동거를 했으니 그 말이 맞을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김지미는 나훈아와의 오랜 동거에도 그와 결혼하지 않았는데 둘의 관계는 연인보다는 스승과 제자에 더 가까웠습니다. 나훈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김지미가 예절과 서예 등 다방면에 걸쳐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나훈아 역시 훗날 회고하며 “김지미는 저를 남자로 만들어준 사람입니다. 하지만 김지미는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보다는 최무룡때 고백했던 것처럼 자신을 꽉 잡아줄 수 있는 카리스마에 있는 사람을 원했죠.”
그리고 김지미는 네번째 남편 의사 이종구를 만나게 되는데 이번엔 연예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전문의였습니다.
오랜기간 결혼 생활을 유지했지만 결혼 3년째부터 이상이 생겼던 두사람은 11년 동안 서로 참다가 결국 이혼하게 됩니다.
“지지고 볶으면서 서로 사랑을 확인하는게 건전한 가정인데 저는 항상 ‘네, 그러세요’하며 살았어요. ‘다녀오셨어요.’ ‘다녀왔습니다.’ ‘나가요.’ ‘안녕히 다녀오세요.’이랬죠.”
“부부라면 싸움을 하고도 금세 이리 와봐 하면서 껴안기도 하고 자기가 잘못해놓고도 큰소리 뻥뻥치고 해야 하는데 격식 차리다 보니 거리감만 생기고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분이 ‘저 늦어요’라고 하면 저는 ‘네 알았어요’하며 살았다니까요. 저 몹시 피곤하게 살았어요.”
김지미는 자기 인생에 대한 깨달음도 남기는데 “살아보니 그렇게 대단한 남자는 없더라고요. 나이 많은 사람과도 어린 남자랑도 살아보니 남자는 항상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더군요.”
“유명하고 파워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가정을 행복하게 한다고 생각하면 절대 오산이죠. 결혼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났을 때 가장 편한 상대와 해야 한다는 걸 이 나이가 돼서야 깨달았네요.”
어릴적 김지미은 자신의 본능대로 움직였지만 이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례로 당시 최무룡에게는 갓 태어난 아들 최민수와 딸 3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가정이 파괴되는 슬픔과 불안을 겪어야 했습니다.
남녀가 서로 만나 사랑을 하는것은 좋지만 상대방의 배우자,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는것은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